2026-11-07 14:08:10
한국 게임산업이 지난 30년 동안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지식재산권(IP)은 무엇일까.
리니지, 메이플스토리, 던전앤파이터, 배틀그라운드 등 세계 시장에서 성공한 게임은 적지 않다. 하지만 IP의 생명력과 글로벌 확장성, 그리고 수많은 개발사와 이용자들이 참여하는 생태계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라그나로크’는 특별한 위치에 있다.
2002년 한국에서 탄생한 온라인게임 라그나로크는 어느덧 24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게임산업의 빠른 변화 속에서 수많은 게임이 등장하고 사라졌지만, 라그나로크는 여전히 세계 각국에서 새로운 게임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그 저력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던 곳이 11월 7일 태국 방콕 엠스피어 몰의 UOB 라이브홀에서 개최된 ’라그나로크 페스타 2026(RAGNAROK FESTA 2026)’이다.
그라비티의 태국 지사인 그라비티 게임 테크(GGT)가 주최한 이번 행사는 단순한 게임 이용자 축제를 넘어, 한국에서 탄생한 하나의 게임 IP가 얼마나 거대한 글로벌 생태계로 성장했는지를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중동·아프리카·남미까지…라그나로크가 연결한 세계
이번 행사장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신작 발표도, 화려한 공연도 아니었다. 바로 전 세계에서 태국까지 찾아온 라그나로크 팬들이었다.
아시아는 물론 중동과 아프리카, 유럽, 북미와 남미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지에서 라그나로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행사장 곳곳에서는 다양한 국적의 팬들이 게임을 체험하고 코스프레를 즐기며 서로 교류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입장을 기다리는 관람객들의 행렬과 전시 공간을 가득 채운 팬들의 모습은 라그나로크가 여전히 강력한 팬덤을 보유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했다.
행사장은 라그나로크 속 항구도시 ‘알베르타’를 모티브로 한 ‘멜로디 오브 알베르타’를 주제로 꾸며졌다. 게임 속 세계관을 현실로 옮겨 놓은 공간에서 팬들은 다양한 체험과 이벤트를 즐겼다.
e스포츠 역시 중요한 행사 프로그램이었다.
‘Ragnarok Stars 2026’, ‘Ragnarok Classic Championship 2026’, ‘Ragnarok Landverse Championship 2026’ 등 3개 대회가 마련됐으며, 총상금 규모는 약 18만5000달러에 달했다.
여기에 공연과 코스프레 행사, 이용자들이 직접 제작한 굿즈를 전시하고 판매하는 ‘RO 크리에이터존’까지 더해졌다.
단순히 게임을 즐기는 것을 넘어 라그나로크라는 세계관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축제를 만들어가는 모습이었다.
24년 전 한국에서 탄생한 온라인게임 하나가 국경과 언어, 문화를 넘어 세계 각국의 이용자들을 연결하고 있다는 사실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누적 다운로드 2억5000만 건…24년의 역사가 만든 경쟁력
기타무라 요시노리 그라비티 CEO는 개막사를 통해 라그나로크 IP의 성과와 미래 비전을 소개했다.
그는 “라그나로크 IP는 지난 24년간 전 세계 이용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며 “라그나로크 시리즈는 누적 다운로드 2억5000만 건을 돌파했으며, 커뮤니티는 전 세계 122개 지역으로 확장됐다”고 밝혔다.
이어 “그라비티는 전 세계에서 다양한 이용자 이벤트와 모임을 개최하며 라그나로크 커뮤니티와의 소통을 항상 중요하게 생각해 왔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성과는 단일 게임의 흥행 실적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라그나로크는 원작 온라인게임을 시작으로 모바일과 다양한 장르로 영역을 넓혀 왔다. 지역별 이용자들의 취향과 시장 환경에 맞춰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며 IP의 생명력을 유지해 온 것이다.
무엇보다 주목할 부분은 24년이라는 시간이다.
게임산업에서 20년 이상 인기를 유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지만, 라그나로크는 기존 게임의 서비스를 이어가는 수준을 넘어 새로운 작품을 지속적으로 탄생시키고 있다.
이는 단순한 장수 게임과 강력한 IP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보여준다.
게임 25종 중 신작만 11종…한국 개발 신작은 단 1종
이번 라그나로크 페스타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 중 하나는 선보인 게임들의 개발 지역이었다.
행사에서는 총 25종의 라그나로크 IP 게임을 만나볼 수 있는 체험 공간이 마련됐다. 이 가운데 신규 라그나로크 IP 타이틀은 11종이다.
특히 신작 11종 가운데 한국에서 개발된 게임은 위메이드커넥트가 제작한 작품 단 한 종뿐이었다. 나머지 10종은 중국과 동남아시아 개발사들이 제작했다.
신작 가운데 해외 개발 비중이 90%를 넘어선 셈이다.
한국에서 탄생한 대표적인 게임 IP임에도 새로운 게임의 개발 기반은 해외로 크게 확장됐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단순히 공개된 게임의 숫자가 아니다.
과거 한국 게임산업의 해외 진출은 국내 개발사가 게임을 제작하고 이를 해외 시장에 수출하거나 현지 퍼블리셔를 통해 서비스하는 방식이 중심이었다.
반면 라그나로크는 한국에서 탄생한 IP를 해외 개발사들이 활용해 새로운 게임을 제작하고, 각 지역의 기업들이 이를 사업화하는 구조로 발전하고 있다.
한국 개발사들의 참여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지만, 다른 관점에서는 한국 게임 IP의 글로벌 경쟁력이 그만큼 강력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해외 개발사들이 20년 넘은 한국 게임 IP를 활용해 새로운 게임을 지속적으로 제작한다는 사실 자체가 라그나로크의 사업적 가치를 보여준다.

하나의 IP에 모인 20여 개 글로벌 파트너
이번 행사에서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다양한 파트너 기업들의 존재였다.
보통 하나의 게임 IP를 중심으로 개최되는 행사는 해당 게임사의 신작 발표나 이용자 이벤트가 중심이 된다.
그러나 이번 라그나로크 페스타에서는 여러 국가의 개발사와 퍼블리셔는 물론, 플랫폼과 기술, 결제 등 다양한 산업 분야의 기업들이 참여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행사장에 설치된 대형 파트너 소개 배너에는 XD, Nuverse, Rastar Games, GungHo, KingNet, 37 Interactive Entertainment 등 게임 관련 기업들의 이름이 등장했다.
여기에 OPPO, AWS, AppGallery, UniPin, GS Neotek 등 기술과 플랫폼, 결제 분야의 기업들도 함께 이름을 올렸다.
현장 배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기업과 브랜드만 20개가 넘었다.
하나의 게임 IP를 중심으로 개최되는 행사에 이처럼 다양한 기업들이 참여한다는 사실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특히 올해 새롭게 마련된 ‘파트너 스테이지’에서는 참여 기업들이 게임을 소개하고 이용자들과 소통하는 프로그램도 마련됐다.
이는 라그나로크가 더 이상 그라비티 혼자 만들어가는 게임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해외 개발사들은 라그나로크 IP를 활용해 새로운 장르와 플랫폼에 도전하고, 각 지역의 퍼블리셔들은 현지 시장에 맞는 서비스를 전개한다.
그라비티는 이러한 사업 구조의 중심에서 IP의 가치를 관리하고 확장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결국 라그나로크의 경쟁력은 하나의 게임이 얼마나 많은 매출을 올리느냐에 그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기업이 이 IP를 활용하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다양한 게임과 사업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지가 중요한 경쟁력이 되고 있다.
이번 페스타는 팬들의 축제인 동시에 글로벌 게임 기업들이 하나의 한국 IP를 중심으로 연결되는 비즈니스의 현장이기도 했다.

AI 시대, 게임 제작은 쉬워져도 강력한 IP는 쉽게 만들 수 없다
이러한 라그나로크의 사업 구조는 최근 게임산업의 기술 변화와도 연결해 생각해 볼 만하다.
생성형 AI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게임 제작의 진입장벽은 점차 낮아지고 있다.
과거에는 상당한 인력과 비용이 필요했던 아트 리소스 제작과 프로그래밍, 번역, 콘텐츠 제작 등의 영역에서 AI를 활용한 효율화가 가능해지고 있다.
물론 AI가 게임 개발의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완성도 높은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전히 기획력과 개발 경험, 기술적 역량이 필요하다.
그러나 게임을 제작하는 기술적 장벽이 낮아질수록 검증된 IP의 가치는 오히려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게임을 만드는 것과 이용자들에게 오랫동안 사랑받는 게임 IP를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라그나로크에는 24년 동안 축적된 세계관과 캐릭터, 브랜드 인지도, 그리고 글로벌 팬덤이 존재한다.
해외 개발사들이 새로운 IP를 처음부터 만드는 대신 라그나로크를 활용하는 것은 이러한 자산의 가치를 보여준다.
이번 행사에서 선보인 신작 대부분이 해외에서 개발됐다는 사실을 AI 기술의 영향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지역별 개발 비용과 시장 환경, 현지 기업들의 역량 등 다양한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다.
다만 AI 시대에 게임 제작 역량 못지않게 강력한 IP를 확보하고 관리하는 능력이 중요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라그나로크의 사례는 주목할 만하다.
게임 제작 기술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24년간 쌓아온 팬들의 신뢰와 애정까지 단기간에 만들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비욘드 라그나로크’…25주년을 향한 새로운 도전
그라비티는 이번 행사를 통해 새로운 비전인 ’비욘드 라그나로크(Beyond Ragnarok)’도 제시했다.
기타무라 CEO는 “2027년 라그나로크는 25주년을 맞이하며 역사적으로 뜻깊은 이정표를 세우게 된다”며 “라그나로크를 단순한 게임을 넘어 전 세계 사람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글로벌 생태계로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어 현재 11개의 신규 라그나로크 IP 타이틀을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하며, 앞으로도 새로운 즐거움과 경험을 지속적으로 선사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는 기존 라그나로크의 인기에 안주하지 않고 IP의 활용 범위를 더욱 넓혀 나가겠다는 선언으로 해석된다.
다만 다양한 신작의 출시는 새로운 기회인 동시에 과제이기도 하다.
하나의 IP를 활용한 게임이 지나치게 많아질 경우 이용자층이 분산되거나 작품 간 차별화가 어려워질 가능성도 있다.
라그나로크가 앞으로도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신작의 숫자를 늘리는 것보다 각 게임의 완성도와 차별성을 확보하고, 기존 팬덤의 신뢰를 지키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한국 게임산업이 라그나로크에서 배워야 할 것
한국 게임산업은 그동안 수많은 흥행작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게임의 흥행을 넘어 하나의 IP를 장기간 유지하고, 이를 다양한 국가의 개발사들이 참여하는 글로벌 사업 생태계로 발전시키는 일은 또 다른 차원의 경쟁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라그나로크는 한국 게임산업이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IP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할 만하다.
이번 페스타에서 확인한 것은 단순히 오래된 게임의 인기가 아니었다.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팬들, 11종의 신작, 그리고 20여 개 글로벌 파트너들의 참여는 라그나로크가 하나의 게임을 넘어 지속적으로 확장되는 글로벌 IP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줬다.
행사 개막사의 마지막에서 기타무라 CEO는 팬들을 향해 인상적인 메시지를 남겼다.
“여러분의 열정 덕분에 라그나로크의 세계는 지금도 빛나고 있다. 여러분의 존재 자체가 바로 라그나로크입니다.”
이어 그는 참석자들과 함께 ’위 아 라그나로크(We Are Ragnarok)’를 외치며 행사의 개막을 선언했다.
그 말은 단순한 구호처럼 들리지 않았다.
중동과 아프리카, 유럽과 미주, 그리고 아시아 각국에서 태국까지 찾아온 팬들의 모습이야말로 라그나로크가 지난 24년 동안 쌓아온 가장 강력한 자산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임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라그나로크의 세계는 이제 전 세계 이용자들과 기업들이 함께 만들어가고 있다.
24년 전 한국에서 시작된 라그나로크의 모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를 무대로 새로운 모험을 시작하고 있었다.
김성태 / mediatec@gamesho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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