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30 18:52:06
만약 한국의 게임 개발사가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한 전쟁 게임을 제작하면서 2001년 9·11 테러 당시의 실제 영상을 별다른 설명 없이 게임 속 전쟁 장면에 사용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미국 사회는 이를 단순한 게임 연출이나 표현의 자유로 받아들였을까. 아마도 상당한 비판에 직면했을 것이다.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국가적 비극을 오락 콘텐츠의 배경 영상으로 소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논란은 충분했을 것이다.
그런데 세계적인 게임 프랜차이즈 ‘콜 오브 듀티’에서 이와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 지난 10월 23일 출시된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4’에 2022년 발생한 이태원 참사 당시의 실제 뉴스 영상이 사용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확산됐다. 제작사 측은 결국 사과와 함께 해당 영상을 삭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필자는 오랫동안 ‘콜 오브 듀티’ 시리즈를 즐겨온 게이머이자 게임산업에 몸담아 온 사람으로서 이번 사안을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단순한 고증 오류나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논란은 글로벌 게임 개발사가 다른 나라의 역사와 사회적 비극을 콘텐츠로 활용할 때 어디까지 고민하고 책임져야 하는지 묻고 있다.

■ 정치적 논란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 희생자에 대한 존중이다
‘모던 워페어 4’는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는 한반도 전쟁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블록버스터 게임의 중심 무대가 됐다는 점에서 출시 전부터 적지 않은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게임이 공개되자 정치권에서는 남북한 전쟁이라는 소재와 게임 속 묘사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정치적 논란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게임은 어디까지나 창작물이다. 가상의 전쟁을 묘사할 수도 있고, 현실의 국가나 정치적 갈등을 소재로 삼을 수도 있다. 그것이 특정 국가나 정치세력에 불편하게 받아들여진다는 이유만으로 게임의 표현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콜 오브 듀티’ 시리즈는 오랫동안 미국과 러시아, 중동 등 현실의 국제정치를 소재로 삼아 왔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논란이 발생했지만, 이러한 정치적 해석의 충돌은 게임이라는 창작물이 감수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러나 이번 이태원 참사 영상 논란은 차원이 다르다. 이태원 참사는 가상의 전쟁도, 정치적 설정도 아니다.
2022년 10월 29일 서울 한복판에서 159명이 목숨을 잃은 실제 비극이다. 희생자 대부분은 젊은이들이었고, 그중에는 한국인뿐 아니라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도 있었다.
그날의 비극은 대한민국 사회 전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러한 참사의 실제 영상을 게임 속 전쟁 피해 장면에 사용했다는 것은 단순한 연출상의 실수로 치부하기 어렵다.
정치적 논쟁과 실제 희생자에 대한 존중은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실제 화면(좌) 게임속 화면(우)
■ 9·11 테러는 안 되고 이태원 참사는 괜찮은가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한국의 게임 개발사가 미국을 배경으로 한 게임을 만들면서 9·11 테러 당시의 실제 영상을 아무런 맥락 없이 사용했다면 미국 게이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미국 사회에서 9·11 테러는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국가적 상처이자 수많은 희생자와 유가족의 기억이 담긴 비극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영화와 게임, 드라마는 이 사건을 다룰 때 그 의미와 맥락을 신중하게 고려한다.
물론 9·11 테러를 소재로 한 창작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을 어떤 의도로, 어떤 맥락에서, 어떤 태도로 다루느냐에 있다.
이태원 참사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가 경험한 비극을 게임에서 다룰 수 없다는 주장이 아니다. 다만 실제 참사의 영상을 전쟁의 참혹함을 표현하는 시각적 소재로 사용하는 것이 과연 적절했는지 묻는 것이다. 이태원 참사는 전쟁으로 발생한 사건이 아니다. 전쟁과 무관한 현실의 사회적 참사였다.
그런데 이를 가상의 전쟁 피해를 묘사하는 영상으로 활용했다면 사건의 본래 맥락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이러한 장면이 세계 각국의 게이머들에게 소비된다는 사실이다. 이태원 참사를 모르는 해외 게이머들은 해당 영상을 실제 한국에서 발생한 사회적 참사가 아니라 게임 속 전쟁을 묘사하는 자료로 받아들일 가능성도 있다. 한국 사회의 아픔이 전혀 다른 의미로 소비될 수 있다는 것이다.
■ 한국을 재현하는 것과 한국을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필자는 최근 ‘모던 워페어 4’를 플레이하면서 한 가지 생각을 반복했다. 한국을 게임 속에 재현하는 것과 한국이라는 나라를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사실이다.
오늘날 글로벌 게임 개발사들은 위성사진과 현지 취재, 디지털 스캔 기술 등을 활용해 세계 어느 도시든 상당히 정교하게 구현할 수 있다. 서울의 거리와 건물, 간판을 재현하는 것은 이제 기술적으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 정서까지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특히 한 사회가 경험한 비극을 다룰 때는 더욱 그렇다. 게임 속 서울의 모습을 아무리 정교하게 구현했다고 해도, 그 사회가 경험한 아픔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국 겉모습만 가져온 배경에 불과하다.

이번 논란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세계적인 개발력과 막대한 제작비를 가진 게임사가 한국을 주요 무대로 선택하면서도 한국 사회에서 이태원 참사가 갖는 의미를 충분히 검토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개발진이 의도적으로 한국 사회의 아픔을 무시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태원 참사가 어떤 사건인지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채 영상을 선택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한국을 게임의 중심 무대로 삼으면서 정작 한국 사회의 가장 아픈 기억 가운데 하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 게임의 표현의 자유는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책임도 따른다
게임산업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필자는 게임의 표현의 자유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게임은 영화나 문학과 마찬가지로 전쟁과 죽음, 정치와 사회적 갈등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불편한 역사라고 해서 창작의 소재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가 모든 연출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 희생자가 존재하는 사건을 다룰 때는 그 사건의 역사적 맥락과 피해자에 대한 존중이 함께 고려돼야 한다.
이것은 게임만의 문제가 아니다. 영화나 드라마, 다큐멘터리 역시 실제 참사를 다룰 때 유사한 윤리적 책임을 요구받는다. 게임이라고 해서 그 기준이 달라질 이유는 없다. 특히 ‘콜 오브 듀티’처럼 전 세계 수많은 게이머에게 영향을 미치는 프랜차이즈라면 더욱 신중해야 한다.
논란이 계속되자, 개발사는 해당 영상에 대해 사과하고 삭제를 약속했다. 필자는 이러한 조치가 필요하고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상을 삭제하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글로벌 게임 개발사들이 다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소재로 삼을 때 어떤 검증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실제 사건의 영상이나 자료를 사용할 때 어떤 윤리적 기준을 적용해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현지 전문가의 검토와 문화적 맥락에 대한 이해는 이제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글로벌 콘텐츠 제작의 중요한 과정이 돼야 한다.
■ 세계적인 게임이라면 그에 걸맞은 책임감을 보여야 한다
‘콜 오브 듀티’는 세계 게임산업을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가운데 하나다. 그만큼 게임이 가진 영향력도 막대하다.
필자는 이번 작품이 한반도를 주요 무대로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이 세계적인 게임의 중심 배경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대한민국의 국제적 존재감이 커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의 도시와 군대, 문화를 게임 속에 등장시키는 것만으로 한국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국을 소재로 삼았다면 한국 사회의 역사와 기억 역시 존중해야 한다.

만약 한국의 게임사가 미국의 9·11 테러 영상을 별다른 의미 없이 오락 콘텐츠에 사용했다면 우리는 미국 사회의 비판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이태원 참사를 바라보는 기준도 다르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반미 감정이나 정치적 논쟁의 문제가 아니다. 어느 나라에서 발생했든, 어느 국적의 희생자이든 인간의 비극을 대하는 기본적인 존중의 문제다.
게임은 현실을 재현할 수 있다. 때로는 현실보다 더 강렬한 경험을 전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실제 사람들의 아픔을 단순한 연출 도구로 소비해서는 안 된다.
한국을 게임 속에 구현하는 데 성공했을지는 몰라도, 한국인의 아픔까지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이번 논란이 세계적인 게임 개발사에 남긴 가장 뼈아픈 교훈이다.
김성태 / mediatec@gamesho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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